함재봉. 아산서원. 2017
저자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칼튼대학교 경제학 학사
존스홉킨스대학교 정치학 석박사
연세대 정외과 교수
프랑스 유네스코본부 사회과학국장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소장 및 정치학과 교수
랜드연구소 선임 정치학자 역임
2장
청의 대륙 정복과 중국 지식인들의 반응
명말청초 시기를 중국 지식인들은 천붕지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시대)라 칭함
북쪽 오랑캐 몽골이 중국 정복해 세운 원나라 (1271~1368)
동쪽 오랑케 여진이 중국 정복해 세운 청나라 (
중국 지식인들의 반성, 성찰
왜 여진 오랑캐에게 망했을까?
명나라 국교 주자성리학파가 원인이라 결론
개인 수양에 치중하는 심학 연구 집중
그 결과 주자 해석 대신 문헌학, 언어학 중심으로 경전 재 해석하는 고증학파, 실천 강조하는 경세치용 학파 발전
명의 주자성리학은 비판적 분석, 대안 제시보다 과거 급제용 출세 도구로 전락
송-원-명의 실사구시 성향이 정체기
주자성리학 대안은 양명학 등장
왕양명(1472~1528)
철학자, 행정가, 장군
주자성리학 = 이(원리) + 기(존재)
이를 깨닫기 위해 마음(성)이 정에 의해 현혹되지 않게 해야 함
수기치인 통해 정을 다스리라
성리학 = 성즉리 : 성이 곧 이, 성이 정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게 하라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론 논쟁
= 4단(인의예지)로 7정(희로애락애오욕)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논쟁
왕양명은 주자성리학에 정면 도전
= 정 안에는 이미 "양지"가 있어서 자연스런 마음으로 행동하면 성 실현한다 : 심즉리
맹자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은 선천적 능력(양능)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선천적 지능(양지)이다.
어린이라도 부모 사랑할줄 아는 것은 인, 윗사람 공경하는 것은 의
인의는 인간의 보편성이다."
주자
"인간은 격물치지 통해 '궁리' 하고,
정으로 인해 성이 흐트러지지 않게 끊임없이 수신 해야 성인 된다." 성즉리
양명
"인간은 선천적으로 시비 가릴 능력 있다." 심즉리
왕양명의 원류 상산 육구연(1139~1192)
"마음이 곧 이(원리),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
no 성즉리, yes 심즉리 : 성리학 부정
우주 원리인 이는 인간 마음에 다 있음
= 인간은 양심대로, 양심껏 행동하면 우주의 원리, 윤리 도덕 거스르지 않는다
= 사물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도 내적 수련만 하면 됨
왕양명은
글 공부에만 몰두해 현실도피적인 사고방식과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하는 주자성리학자들에 염증
생각만 하지 말고
양심에 따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라!

황종희의 주자학, 양명학 비판
황존소 (1584~1626)
1616년(만력제 44년) 진사 급제, 천계제(1620~1627) 때 산동도어사 역임
동림학파 핵심 : 명 말기 정치, 사회 혼란 해결 위해 사대부들, 사림 결사체
동림당 기원
1604년(만력제 22년) 내각대학사(황제 고문) 지낸 구헌성(1550~1612)이 조정 쇄신 실패하자 낙향, 선비 고번룡(1562~1626) 도움으로 동림서원 설립, 조정의 환관들에 적대적
당시 황제 천계제는 15세 즉위, 학습 장애로 글 읽지 못해 환관 위충현(1568~1627)에게 일임, 환관 정치
대신 목공에 특기 발휘, 위충현의 국정 농단
황존소는 천계제에게 끊임없이 위충현 비리 상소.
아들 황종희는 15세에 베이징에서 동림당 vs 환관 권력 투쟁 목격
1626년 부친이 투옥, 옥사하자 아들 황종희는 복수 다짐
1627년 천계제 사망, 동생 숭정제(1628~1644) 즉위하자 위충현 파직, 귀양, 위충현은 자결
황종희는 위충현 세력 척결에 앞장 섦
황종희
= 과격한 행동파 + 학자
= 양명학자 유종주(1578~1645)에게 사사
= 부친 유언 따라 서학, 경학, 역사 공부
= 21~33세 4번 과거 낙방
= 35세 1644년 명 멸망, 반청 운동
= 1649년 낙향, 주자성리학, 양명학을 현실도피라 비판
= 군주제 비판
이상적인 시대에는 천하만민이 주인이고, 군주는 객이었다.
군주가 평생 경영하는 것은 천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군주를 주인으로 삼고, 천하만민을 객으로 삼아서
온 천하에 덕이 있고, 편안한 땅이 없는 것은
군주 때문이다.
고염무, 왕부지, 안원의 주자성리학 비판
명의 3대 유로(망국의 신하)
= 황종희, 왕부지, 고염무
주자성리학 신랄하게 비판
"경서만 읽지 말고 6예 (예, 악(음악), 사(활), 어(말타기), 서(서예), 수(수학)) 실천 중시 + 역사 공부"
왕부지
학자의 아들, 1642년 과거 합격, 1648년 청군이 고향 후난 침략, 왕부지는 의병 일으켜 저항, 패배
33세에 고향 석선산 40여년 칩거, 학문 전념
유학+도교+불교
송대의 성리학, 명대의 양명학 비판 : 이가 기에 우선한다는 성리학 기본 명제 부정
"이와 기는 같다. 사물의 질서다.
태극, 천리 같은 형이상학, 추상적인 것은 없다.
심, 성은 모두 기의 일부분
세상 만물은 모두 기(그릇)이다 : 구체적, 특정한 물체, 체계, 제도 : 모든 물체에 내제 한 질서, 체계, 제도의 원리
도, 이는 기의 다른 측면이다.
구체적인 기가 있기에 이가 있을 뿐, 기가 없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리학의 이성으로 감성 억제하라는 핵심도 부정
감성에 우선하거나 독립적인 이성은 없다
오직 기일 뿐이다
기가 완성된 것을 실천이라 한다.
형체는 이미 존재한다.
형체 존재 후에 형이상이 존재, 형체 넘어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른 덕은 군신과 부자이다.
노자의 비어있음도 기의 비어있음이다.
이란 구제척인 사물, 체제, 제도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 관통하는 성리도 없다.
모든 기는 그것이 존재하는 당시의 조건들을 반영하는 것 때문에 역사는 반복될 수 없다.
유교가 이상 사회로 여기는 봉건사회는 재건될 수 없다.
3장
청의 대륙 정복과 조선의 대응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족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이 알던 세계는 붕괴된다.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국을 건설하려 했던 명나라와 조선은 문화적, 이념적 동질성 공유
명에서 양명학이 유행하자 조선의 퇴계 이황(1502~1570) 등 주자성리학 학자들이 중화 문명의 쇠락을 비판
명 붕괴하자 문명의 중심에 대해 혼란 : 새로운 정체성 필요 = 예송 등장
- 소현 세자 : 닫히는 조선의 첫 희생양
소현세자 1612-1645
인조와 인렬왕후 한 씨의 적장자
1637년 1월 30일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함께 청태종에게 항복 후 청군 포로, 수도 심양(선양) 8년 인질
조산과 청의 중개자 역할
청태종이 조선군 징발 요구, 조선이 늦게 반응하자 소현세자가 조선 옹호, 질책받음. 홍타이지 궁 밖에서 석고대죄하기도, 조선 인질 노예 시장에서 몸값 지불해 조선으로 돌려보냄
인조는 소현세자 부부 감시 명령
청의 하수인 조사, 청 행사 참석 행동 비판
인조와 조선은 명이 청을 이길 것이라 판단, 병자호란 13개 항복 조건 이행 지연
1644년 세자 부부 일시 귀국해 세자빈 강 씨 부친 강석기(우의정)의 묘 참배하려 하자 인조가 막음
1641년 8월 소현세자는 청과 명의 전투까지 참가 : 진저우 전투, 명의 명장 조대수
1644년 5월 2일 소현세자 베이징 전투 입성
베이징 자금성 내 남당(성당) 거주하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 만남, 서양 천문학 전수
소현세자가 조선 귀국하자 천문, 산학, 성교정도 등 책, 천주상 선물함
아담 샬의 기록
“대부분의 코레아인들이 그러하듯 소현세자도 글 읽는 것을 사랑했다.
소현세자의 답장은 ”어제 구세주 하느님의 성상과 천구, 천문 서적, 에우로파 세계의 학문을 담은 여러 서적들을 받았습니다.
1660년 3월
송시열 vs 윤휴의 예송 논쟁
3년 상이냐? 1년 상이냐?
1674년 2차 예송
효종의 중전 인선대비(1619~1674) 승하, 장례복 문제
국조오례의 : 며느리 복상은 큰며느리 1년, 아래 며느리 9개월
효종이 서자이므로 예조는 9개월 복상 결정
= 서인들은 송시열 주장대로 효종이 정통, 장자 아님을 주장
= 남인들은 예조 결정에 반대
"육경"이란 성인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표준을 세우고, 만물의 도리를 이해하며, 사업을 성취시켜 주는 글로서 천지의 지극한 가르침입니다.
주자 성리학 근본주의와 도통이론
송시열 "숭명반청론" "체이부정론"은 도통이론에 기반
주자성리학은 도통 vs 왕통 구분
도통 = 성인들이 세운 이상적인 도덕적 질서
왕통 = 현실 세계의 권력 질서
도통은 요임금이 순임금 양위하면서 세운 전통
= 요순은 부자 관계 아닌데도 왕권 계승을 가족에게 하지 않고, 신하들 중 적합한 인물에게 함
신하들이 순을 추천하자 요가 왕위 임명
왕 될 자격 갖춘 성인 인정
= 성인에서 성인으로 이어지는 전통
= 공자, 맹자까지 이어지다 끊김
= 남송대 정호(1032~1085) 정이(1033`1107) 형제 계승
= 주희가 도통 집대성
송시열은 주자의 도통 이론 수용
= 공자 이후 순수 학자들이 도통 계승 주장
= 조선의 유림이 고려말 정몽주 문묘 배향, 사육신 복권 주장
송시열
왕통과 도통
정치권력과 도덕 정통성은 구분 = 청나라가 정치권력은 가졌으나 도통은 아님
명나라는 도통 완성한 문명
조선이 뒤 이어 도통 계승한 나라
반청, 친명 : 명의 문명 보존
정치적으로는 청에 굴복, 도덕과 문화적으로는 명 계승
청나라는
정치권력은 있으나
정통은 아니다
but 허목, 윤휴는 모든 문명의 기준을 명으로 삼을 필요 없다 주장
시대 변화에 맞는 문명 기준 세워야
윤휴 : 왕족과 별개인 독립된 조선이란 국가가 정통과 문명의 기준이다. 주자성리학의 "정통" 부정
조선은 윤휴 대신 송시열의 주장을 선택
주자에 대한 일체의 비판 금지
명나라만이 주자성리학이 완벽하게 구현된 왕조로 선언
근본주의 주자성리학 수립
: 왕과 백성 모두에게 예송 적용
: 청나라 문물 거부
: 정치적, 사상적 쇄국 정치
숭명반청 사상
명대 조공 가져가는 사절단 = 조천 (조정 알현)
청대 = 연행사 (연경 방문단)
청의 사신 = 호차(오랑캐 칙사)
청의 강희제 = 북인
1704년 12월 (숙종 30년) 숙종은 창덕궁 대보단 설치, 명의 태조(홍무제), 신종(만력제), 의종(숭정제) 숭배
청의 문명(변발 등) 강요 거부, 명의 주자성리학 기반 예법, 제도, 복식 고수
마지막 문명국이란 자존심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쇄국 정책
조선의 명 숭배에 눌려 년 4회 연행사를 1회로 축소
300km의 만주, 조선 접경지에 목책 설치해 조선의 발원지인 만주 접근 통제
해로 차단
주자성리학의 근본주의, 남존여비 사상
고려까지는 여성 지위 높았음
주자성리학은 여성 격하
결정적 계기 = 병자호란
청군에 몸 더럽힐까 봐 자결한 여성 많았고, 살아있는 여성들도 겁탈, 포로 생활
탈출한 소수의 환향녀조차 정절 지키지 못했다고 질타
우의정, 효종의 장인인 장유(1587~1638)의 딸이 봉림대군과 결혼했으나 선양에 8년 인질 생활
귀국 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딸은 인선왕후(1619~1674)
장유의 아들 장선징(1614~1678)은 한이겸의 딸과 결혼, 강화도 함락되면서 부인 한 씨가 청군 포로로 심양 끌려갔다가 속환
장유가 예조에 아들과 며느리 이혼, 새 장가를 청원
좌의정 최명길(1586~1647)의 건의
환향녀를 이혼 허용하면 조선 여인들이 속환하려 하지 않을 것
포로로 끌려간 여성들이 전부 몸이 더러워졌다고 판단할 수 없다.
인조는 최명길 건의 수용, 장유의 아들, 며느리 이혼 불허
but 사대부 자녀들은 전부 새 장가들고, 부인들을 버림
조선왕조실록 사관의 기록 "두 왕을 섬길 수 없듯이 포로 끌려갔던 여인이 다시 남편 섬길 수 없다"
청나라의 조선 여인 관점
청군이 베이징 입성 이후에도 반청 세력 진압
양쯔강 하류 양저우(양주)는 남명 황제 홍광제 충성 군대 주둔
청 누르하치의 15째 아들 예친왕 도도가 양주 주민 학살 명령
1645년 5월 20일 양주 함락, 10일간 학살
생존자 왕수초 "양주십일기" 기록
청 말기에 쑨원(손문, 1866~1925)이 반청 정서 위해 보급
"청군 왈, 우리가 조선 정복했을 때는 수만 명의 여자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중 한 명도 정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같은 대국 여자들은 어찌 이리 수치심을 모르는가?"
청군에게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을 선택했던 수많은 조선 여인들을 조선 남자들은 버렸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은 열녀 발굴에 집착.
태조~명종(1534~1567) 175년 동안 절부 270명
선조~순종(재위 1907~1910) 344년 동안 절부 870명
특히 정묘호란, 병조호란 기간였던 인조(재위 1623~1649)에 202명
조선 전기의 절부들은 재혼 거부형
조선 중 후기 절부들은 순절 지키고, 남편 따라 죽는 종사형
"선비가 평소에는 절의를 외치지만 전쟁이나 국가의 위험 때는 목숨 거는 이가 적다.
그러나 여인들은 반대이다."
여성을 지켜주지 못한 사대부들이 여성의 정절 사건들을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고, 여성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함
남존여비의 강화
병자호란 250년 후인 1895년 조선 방문한 기록 남긴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조선의 농촌 여성의 삶에 즐거움은 없다. 그녀들의 삶은 고통뿐이다.
유일하게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며느리에게 전가하는 것뿐이다.
30살에 이미 50살로 보이고
40살이면 대부분 치아가 다 빠진다.
자신을 예쁘게 치장하고픈 욕망도 아주 이른 나이에 사라져 버린다.
그녀들의 생각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있다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수많은 신들에게 치성을 드릴 때뿐이다.
여성들을 억압하는 전통은 500년 전 조선 왕조에 의해 시작되었다.
조선 남자들과 여자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선의 도시인들과 상류층의 부도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외간 남자들이 여자의 손을 만지면 딸들은 아버지 손에, 부인은 남편 손에 죽거나 자살을 했다.
최근 한 집에 불이 났는데 몸종이 주인아씨를 구하지 않아 죽게 방치한 일이 있었다.
이유를 묻자 어떤 외간 남자가 아씨를 구하려고 몸을 만졌기 때문에 살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란다."
